지난 정권 인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계엄의 시점”이라고 했다. 그 다음주 윤석열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마러라고 회동이 약속돼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 별장인 미국 마러라고 리조트는 당시 세계 정치의 중심이었다. 세계 정상들이 이곳에 초청받으려고 줄대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도 잡지 못한 기회를 한국이 먼저 잡은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트럼프와 이념적으로나 기질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었고,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자 주요 메신저인 보수 기독교계의 지원을 받았다. 무엇보다 대통령 재임 전반기에 자신이 구축한 한미 관계의 토대가 단단했다. 그는 정부 관계자와 언론계 지지자, 측근들까지 반대하거나 꺼리던 징용 해법을 결단했다. 이를 토대로 중국 패권주의에 대응하는 한미일 3국의 협력 관계를 복원했고, 다시 이를 토대로 구두 약속에 불과하던 한미의 북핵 대응과 협력을 실질적으로 만들었다. 지역 분쟁에 미국의 개입을 꺼리는 트럼프이지만, 윤 대통령의 이념과 자유 진영에 대한 협력적 자세는 좋게 평가했을 것이다. 마러라고 회동도 그래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진심이었다. 2023년 4월 한미 정상의 워싱턴 선언 몇 달 뒤 정부 관계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워싱턴 선언은 한국이 핵 개발을 하지 않는 대신 한미 핵협의 그룹을 만들고 핵 대응 공동 훈련과 교육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해 8월 ‘을지 자유 방패’ 연습을 앞두고 전달된 미국의 계획에 한국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을 가정한 훈련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대통령 곁에 있던 인사는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훈련 문서를 집어 던지고 관련 기관장을 호출해 핵무기 제조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규모가 매우 컸는데 핵무기 실험을 하지 않아도 그중 30%라도 작동할 수 있다는 의구심을 적에게 주면 충분한 억지력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윤 전 대통령의 분노가 미국에 어떻게 전달됐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여하튼 이듬해 7월 한미 정상이 핵 억제 공동 작전 지침을 승인했고, 8월 ‘을지 자유 방패’ 연습 때 한미는 북한의 핵 공격을 가정한 연습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작년 말 새로 작성한 한미 연합작전 계획에 한국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 상황이 반영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충분한 억지력까지 갈 길은 멀지만 상당한 진척을 이룬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징용 결단은 미국과 북핵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재명 정권은 윤석열 시대를 지우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분야에서 그 시대를 지우고 온갖 이유를 붙여 단죄하고 있다. 하지만 외교 안보는 쉽지 않다.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정권 출범 직후, 트럼프 정권이 외교 라인을 통해 전달한 첫 메시지는 “일본과 맺은 관계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 예상을 깨고 일본을 방문해 한일 우호를 재확인한 것은 이 정부의 실용 외교 노선이 아니라 미국의 메시지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 등 몇 나라를 제외한 APEC 다수 회원국의 현안은 북핵과 중국 패권주의다. 한국이 이 현안에 가장 위험하게 맞닥뜨렸다는 사실은 중학생도 안다. 그런데 중국과 남중국해 분쟁을 겪는 필리핀에 군함을 팔면서, 중국의 서해 도발 대처엔 예산 한 푼 주지 않는다. 한국이 빠진 미·북 정상의 판문점 회동을 외교장관이 “환상적”이라고 했다. 얻을 건 ‘북핵 용인’밖에 없는 회동이 한국에 “환상적”인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한국 대통령이 “아주 오랫동안 잘 참은 것 같다”고 했다. 정도를 넘어서면 외교 수사가 아니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5/10/28/UKFSYHVYPRFAHADLH6LZCILL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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