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철 원장 퇴임 앞두고 직언
‘저성장의 늪’ 탈출 위한 모범 답안 제시
최근 국책 연구 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는 보고서가 연일 화제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꿰뚫고, 민낯을 드러내고 있어서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선 “KDI가 ‘저성장의 늪’ 탈출을 위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나랏돈을 과감히 푸는 ‘확장 재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부 고용 지표 호조를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는 현 정부에 부담이 될 법한 주장도 거침없이 내놓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정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국책 연구 기관이 정부의 ‘뼈를 때리는’ 상황이 이례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최근 가장 눈길을 끈 분석은 나랏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려는 현 정부의 재정 정책에 대한 우려를 여과 없이 드러낸 부분이었다. 지난 11일 KDI는 올 하반기 경제 전망을 발표하며 “재정 정책은 경기 회복 속도에 맞춰 확장적 정책 기조를 점차 정상화해 나가는 방향으로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어 “큰 폭의 재정 적자 흐름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내년 예산을 역대 가장 큰 폭인 55조원 늘려 728조원 규모로 짠 것을 비롯해, 민간 소비 쿠폰을 뿌리고, 농어촌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등 현금성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재명 정부 입장에서 불편해 할 만한 말이었다. KDI는 “경기 부양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며 쐐기를 박았다.
KDI는 이달 초 “낮은 실업률을 반드시 고용 개선의 신호로 볼 수는 없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고용 지표가 발표될 때마다 “역대 최저 실업률과 가장 높은 고용률을 기록했다”며 홍보하는 정부를 머쓱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KDI에 따르면, 성장률 둔화에도 실업률이 수년째 2%대의 낮은 수준을 보이는 것은 ‘구직 포기’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고용 한파가 길어지며 구직을 포기해버린 ‘쉬었음’ 청년이 늘면서 실업자 수가 줄었고, 이로 인해 실업자를 경제활동인구 수로 나눈 실업률이 줄어드는 ‘착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KDI의 설명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KDI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에서 탈피하려면 “저출생·고령화로 늘고 있는 복지 지출을 줄이고, 낮은 생산성을 극복해 기업들의 국내 투자를 유도하며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좀비 기업’을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하고 있다. KDI는 지난 5월 보고서를 통해 “경제구조 개혁 없이 현 수준의 생산성을 유지할 경우 2040년대에 잠재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조동철 원장, 자유로운 연구 보장
KDI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는 조동철 KDI 원장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022년 12월 부임한 조 원장은 이전에도 KDI에서 오랜 기간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거시경제연구부장,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등을 지냈을 만큼 KDI에 잔뼈가 굵은 경제학자다. 국내 최고 수준의 경제 분야 ‘두뇌’들이 모인 KDI라는 기관이 한국 경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조 원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눈치 볼 것 없이 ‘할 말은 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으로 활동한 지난 2016~2020년에 조 원장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 학자로 통했다. 조 원장은 당시 한국 경제가 저성장·저물가에 신음하던 상황에서도 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한은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달 말 퇴임하는 조 원장은 “잠재 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게 아니지 않으냐”며 “최근뿐 아니라 (원장 부임 이후) KDI는 계속 할 말은 해왔고, 요즘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다”고 했다.
김지섭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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