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공포는 20년 전, 나이 50을 바라보는 시점에 불현듯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가 궁금증의 핵심이자 두려움의 근원이었습니다. 내과의사로서 20년 넘게 환자에게 심폐소생술도 하고 임종을 옆에서 수없이 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는 죽음을 늘 다른 사람의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내 존재 자체와 이를 받쳐주던 모든 게 없어질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을 겪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습니다.
죽으면 매일 얼굴을 맞대던 가족들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함께 웃고 울어 주던 친구와 지인들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저녁노을,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과도 영원한 이별이고, 나의 모든 것이 깜깜한 암흑 내지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생각했습니다. 오늘 퇴근하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취침 중에 심근경색으로 돌연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암울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함과 막막함이 몰려들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과 두려움에 대해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과대학의 긴 교육 과정과 전공의 과정에서 배운 건 오로지 ‘생물학적’ 죽음뿐이었고,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 죽음 너머에 대해서는 그 아무도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죽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내가 느꼈던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과 무력감은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그런 감정들을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내는지의 정도만 다를 뿐이었지요.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규칙적으로 나가며 종교에 의지하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입각한 과학 교육을 받아왔고, 그러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끝없는 훈련을 받아 온 터라 종교에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대학 입학 이후로 종종 읽었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을 반복해 읽어봐도 내가 소멸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은 그대로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든가 ‘일체 만법이 공(空)하여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는 설법도 그때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죽음은 태어남과도 같은 것, 자연의 신비로다. 어떤 요소들이 결합되어 태어남이 있다면, 그 요소들과 똑같은 것들로 해체되는 것이 죽음일 뿐. 그것에 대해 곤혹스러워할 건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당장 내가 마주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도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바로 내일이다” 같은 말들도 제 귀에는 모두 다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습니다. 간혹 주위에서 “죽음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무슨 배짱으로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이 말기암 진단을 받아 시한부 선고를 받더라도 저런 대범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하며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사다 준 정신과 전문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의 <사후생-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의료현장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많은 환자들이 겪은 삶의 종말 체험과 심장이 멎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이 경험하는 근사체험을 수십 년간 관찰해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연구해 쓴 책이었습니다. 죽어감 그리고 죽은 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그 책을 읽으며 단번에 해소되었습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어떤 종교나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 죽음과 관련해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종합한 결과를 책에 담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과학적인 탐구 방법에 의해 도달한 결론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는 그렇게 얻은 죽음에 대한 앎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줌으로써 공포를 덜어준 셈입니다.
사망 판정을 받아 육체는 부패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인간의 의식은 명료하게 유지됩니다.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이 없더라도 의식체는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경이로움은 저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새롭게 눈이 뜨이면서 시작된 인간의 죽음과 죽어감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한 탐색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켜주었고, 삶을 대하는 저의 태도를 점점 바꾸어 갔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 덕분에 저는 40년간 해온 진료를 그만두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죽음의 실체를 알려주리라 다짐했습니다. 죽음 덕분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일에 전념하게 된 계기입니다. 18년째 하고 있는 죽음학 강의는 2023년까지 725회 진행됐습니다. 이 강의를 들은 이들 가운데에도 저처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누군가가 있겠지요. 이 글을 통해서도 그러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기고자=정현채 서울대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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